w. 흑막
@xmo_II
[BGM; https://youtu.be/fW2CpPLMon0 ]
나는 너로 하여금 그날의 여름을 떠올려. 고등학교 2학년, 네가 전학 온 해의 여름 말이야. 난 그 여름을 잊을 수가 없어. 까맣게 잊고 살다가도 여름이 찾아오면 자연스레 그날이 떠올라. 너는 어때? 너도 여전히 여름을 떠올리고 있니? 나를 생각하고 있어?
나는 말야, 가끔씩 그 여름에 무언갈 놓고 온 기분이 들어. 선선한 바람과 뙤약볕 아래 운동장에서 신나게 공을 차는 아이들의 함성, 텅 빈 교실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피아노와 더운 바람을 불어주던 낡은 선풍기도. 찝찝한 이 기분은 그때의 여름과도 닮았어. 놓고 온 건 아무것도 없는데 이 기분은 도통 사라질 기미가 안 보여. 모든 건 그 자리 그대로인데 나는 왜 이러는 걸까. 보고 싶으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면 될 일인데, 나는 미련하게 계속 앞으로 나아가기만 해.
한 번 돌아가면 그곳에서 못 헤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그래, 솔직히 말해서 조금 두려워. 분명 네가 이 말을 듣는다면 코웃음을 칠 테지만, 난 진심이야. 그곳에 돌아가 파묻히는 게 두려워. 참 이상하지?
그때가 그리우면서도 두렵다니. 내가 생각해도 이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아니다. 생각해보니 너와 함께 한 모든 것들이 비현실적이었어. 그때는 나한테 있어서 여름의 크리스마스였으니까. 산타 할아버지가 오지 않아도, 커다란 선물이 없어도, 내겐 크리스마스처럼 황홀했거든. 더할 나위 없이 청명했고 아름다웠지. 네가 생각하는 그때의 여름은 어때? 네 여름도 내가 생각한 것처럼 밝게 빛났으면 좋겠다. 새하얀 눈처럼 깨끗하고 순수한 여름이었으면 좋겠어. 넌 모르겠지만 당시에 종종 이런 생각들로 간절하게 바랐어, 나.
종종 그때가 떠올라. 널 위해 학교가 비워둔 교실 말이야. 우리 거기서 자주 놀았잖아. 사고도 쳐서 많이 혼나기도 했지만. 그곳엔 엄청 멋있는 피아노 한 대가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진 모르겠어. 너랑 헤어지고 난 후로 한 번도 학교에 가본 적이 없거든. 그 피아노가 여전히 남아있는지 궁금하기도 해. 나 그 피아노 좋아했거든.
정확히는 네가 연주할 때 나는 소리를.
네가 가끔씩 내게 피아노 치는 법도 알려줬잖아. ‘도’도 모른다고 늘 구박받긴 했지만, 그래도 너는 처음부터 천천히 알려줬었지. 덕분에 나는 비행기를 연주할 수 있게 됐고.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이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연주할 수 있는 거 알지? 근데 너는 내 연주 들으면 화낼지도 모르겠다….
피아노가 있던 교실에서 우리 참 다양한 일을 겪었는데. 너는 어쩌면 기억 안 난다고 말할 것 같아.
다 기억나면서도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겠지. 난 네가 생각한 것보다 널 더 잘 알아. 그렇지? 그래서 그때 네가 거짓말했을 때도 내가 단번에 알아차렸잖아. 넌 은근 티가 난단 말야. 바보같이.
네가 처음으로 내게 입 맞췄을 때, 내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던 거 기억해? 너는 아무런 뜻도 없다고 말했잖아. 충동적으로 해놓곤 ‘그냥’ 이란 말로 얼버무렸지. 나 사실은 그때부터 알았어. 네가 날 다르게 보고 있단 걸.
어쩌면 나도 그때부터였을 지도 몰라. 너에게 다른 감정을 가지게 됐을 때가, 네 마음을 눈치챘을 때부터인 것 같아.
그런데 너는 하나도 몰랐잖아. 바보같이. 난 다 알았는데! 네가 말버릇처럼 내뱉었던 멍청이가 사실은 내가 아니고 너였던 거지. 멍청야마군. 그래도 나는 네가 고민하는 시간마저 좋았어. 가끔씩 내게 조심스럽게 대하는 손길도 좋았고, 모든 걸 꿰뚫어 볼 듯이 쳐다보는 눈빛도, 또 손에 꼽지만 종종 다정하게 대해주는 모습도, 나는 좋아했어.
시간이 흐르고 너와 내가 낯간지러운 감정에 익숙해졌을 때,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들은 여전히 생생해.
그 당시에 장소와 소음, 하늘과 뜨거움, 조용한 피아노 소리와 네 모습은 한 장의 사진처럼, 혹은 비디오처럼 머물러있어. 햇빛이 좋아서 활짝 열어둔 창문 사이론 후덥지근한 바람이 들어왔고 구식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창문 근처에 울창하게 자란 나무에선 매미 울음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웠지. 나는 그때 피아노 위로 올라가 앉아있었어.
실내화는 바닥에 떨어져 아무렇게 나뒹굴었고, 너는 한참이나 날 끌어내리려 했지만 뜨거운 열기에 금방 포기하고 날 가만히 올려다봤잖아. 난 그 장면이 안 잊혀져.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고, 너랑 장난친 것도 아닌데.
조용히 눈을 맞추고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내가 먼저 네 이름을 불렀어.
‘카게야마.’
너는 더워서 그랬는지 아니면 귀찮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대답 대신 눈을 깜빡이고 날 쳐다봤지. 그래도 난 그 눈 깜빡임이 대답이란 걸 알았어. 난 생각한 것보다 널 더 잘 안다고 했잖아. 네 행동 하나에도 난 모든 뜻을 알아챌 수 있어.
그때도 그랬었지. 너는 왜 부르냐고 말하는 것처럼 날 쳐다봤고, 나는 그런 네게 입을 맞췄어.
나를 두 팔 사이에 가두고 올려다보는 네 얼굴이 유독 가까웠거든. 오른쪽 눈가에 입을 맞추고 떨어지니까 엄청 커다란 심장 소리가 울리더라고. 그게 나한테서 나는 건지, 아니면 너한테서 나는 건진 여전히 미스테리야.
어벙해진 네 표정은 꽤 볼만 했어. 가볍게 웃고 시간을 확인했을 땐 오후 세시 이십 사분이었어. 나 기억력 좋지? 사실 이때만 뚜렷하게 기억나. 이유는, 나도 사실 잘 모르겠어. 나도 모르는 새에 그때를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남겨뒀나 봐.
널 부르고 나선, 매미는 시끄럽게 울어대고 요란스럽게 움직이는 선풍기에, 운동장에선 축구 하는 학생들의 고함이 들려와 조용할 새가 없었는데도 나는 네게 조용하다고 말했어.
‘조용하다. 그치?’
참 엉뚱한 말인 것 같아. 할 말이 없던 것도 아니었는데, 조용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이상해. 근데 너는 더 이상하게 대답했잖아. 그렇다고 말이야.
‘응.’
그러곤 가까이 다가와선 내 목에 고양이처럼 얼굴을 비비더니 슬쩍 얼굴을 들고 나한테 뽀뽀했어, 너. 그것도 턱에다가.
‘뭘 한 거야?’
‘아무것도.’
내가 웃으면서 뭐 하냐고 물어보니까 너는 뻔뻔하게 아무것도 아니라 답했었지. 네 한마디에 빵 터졌잖아.
거짓말하는 모습이 너무 당당해서 하마터면 그 말 믿을 뻔했어. 그러고 나서 내가 하도 웃어대니까 네가 시끄럽다고 째려보더라. 나도 참으려고 시도는 해봤는데 이상하게 계속 웃음이 나오더라고. 결국 나중에 가서 너는 말하기를 포기하고 날 째려보기만 했었지.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그때, 우리 더위 먹었던 것 같아. 어때? 네가 생각해도 그런 것 같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왜 이런 낯간지럽고 이상한 말과 행동을 했겠어.
아니다, 아니야. 솔직히 말해서, 사실 나는 더위 때문이 아니었어. 그때의 감정이 난 아직도 이어져 왔는걸. 더위란 핑계로 단순한 감정이라 치부하기엔 난 여전히 그 감정에서 허우적거리고 있고, 여름이 찾아오면 나는 너를 찾아다니잖아. 그때 깨달아야 했어. 그건 푹푹 찌는 여름 탓도 아니고, 그저 흘러가는 감정도 아니란 것을 말이야.
참 이상한 여름이었지. 너는 내게로 왔고, 나는 네게로 향했으니. 몸이 탈 정도로 뜨거운 여름이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다지 더웠던 것 같지도 않아. 오히려 따스한 기억들이 더 많은 듯해. 찬란하고 아름다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여름을 놓지 못하는 건, 내가 미련해서일까? 추억을 추억으로 담아두지 못해서 이러고 있는 걸까?
카게야마. 네가 떠나던 날,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어. 여전히 그날을 떠올리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해.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궁금하거든. 그때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인지, 혹은 잠깐의 이별인 건지. 잠깐이라면 시간은 얼마나 걸릴 것인지, 너는 언제쯤 돌아올 것인지. 내게 돌아오기는 하는지, 나는 네 생각이 궁금해. 하염없이 널 기다리기엔 초라해져 버릴 내가 안쓰러웠고,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너를 잊어버리면 모든 게 어긋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카게야마. 너도 나를 생각하고 있어? 네가 지내는 그 여름 속에서 나를 떠올리고 있을까?
너는 나로 하여금 그날의 여름을 떠올리고 있니? 여전히, 여전히 나를 기억하고 있어?
카게야마. 어서 대답해줘.
나는 네가 보고싶어.
기억이 아닌 내 앞에서 존재하는 너를 말이야.
너 역시 그러길 바라.
너도 나처럼, 그 여름 속에 남아있기를.
결국에 우리의 사랑은 여름이었단 걸, 네가 잊지 않았기를.
간절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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