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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네 인생의 봄

 

 

 

W. 이름 

    @h21_new

 

 

봄인가?

아니.

3월의 중순, 끝에 다다르는 어느 날. 계절의 이름을 묻는 작은 질문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빠르게 부정당했다. 호흡 한 번에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한 의문이 쪼그라든다. 봄이라고 정의하기엔 입안에서 왕복하는 공기가 충분한 온도를 머금고 있지 않다. 입김이 나올 만큼의 냉기도 없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기온이 내려간 탓이다. 졸업식을 코앞에 둔 카게야마 토비오가 생각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졸업식은 아직 며칠이나 남겨두고 있었으므로, 카게야마는 어떤 긴장감도 느끼지 못한 채 책상에 엎드렸다. 비단 그에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라면 다른 곳에 있지. 엎드린 지 1초도 안 되어 벌떡 상체가 올라왔다. 덜커덩거리며 책상과 부딪힌 몸이 소음을 낸다. 소란스러운 교실에서 일어난 작은 소동이다. 근처에 있던 몇몇의 눈이 반사적으로 소동의 근원지를 향했다. 질린다는 카게야마의 표정과 마주하고 대부분이 다시 눈을 떼기까지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덩치가 좀 더 커진 그의 표정은 여전히 험악한 구석이 있었다.

카게야마는 얇은 와이셔츠 너머로 방비 없이 책상과 맞닿은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낮은 기온을 따라 덩달아 사물의 온도도 낮아졌다는 걸 미리 생각했어야 했는데. 요 며칠간 따뜻했던 걸 떠올리며 하던 행동을 그대로 하다가 공연히 당하고 말았다. 가해자는 없는데 괜히 피해자만 생긴 셈이다. 무릎 부근이 찌르르 울린다.

세게 충돌한 건 아니었다. 놔둔다면 자연히 사라질 통증이었으니, 무시하기로 한다. 그리고는 앞으로 팔을 뻗는다. 다시 엎드리기 위해선 대책을 강구해야 했으나, 가장 간편한 방법을 택하는 대신 직관을 따르기로 한다.

뻗은 손에 담요가 잡혔다. 힘을 주어 잡아당기자 손쉽게 딸려왔다. 스르르, 가쿠란을 입은 등이 드러난다. 카게야마에 비하면 확연히 작은 등이었다.

앞자리의 히나타 쇼요는 간혹가다 꼭 자기 닮은 물건을 가져오는 재주가 있었다. 어린 동생의 영향인 걸까. 그의 방문마다 인사해주던 이를 떠올리며 선명한 귤색의 담요를 매만졌다. 한겨울에 덮어도 될만한 보들보들한 촉감이었다. 덮고 잔다면 분명 책상의 온도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벗어뒀던 가쿠란을 집어 들었다. 하나를 받았으니 하나를 줘야 했다. 그리고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담요를 가져갔으니 그에 상응하는 다른 무언가를 줘야 맞는 것이다. 소리 없이 일어나 작은 등에 그의 가쿠란을 덮을 때까지 핑계를 댔다. 어딘가 이상한 등가교환이었다. 받은 게 아니라 아무렇지 않게 제 것인 것처럼 가져간 거고, 가쿠란이 있었다면 수고를 들여 히나타의 담요를 가져갈 이유가….

등 뒤로 담요를 둘렀다. 익숙한 귤색이 몸을 감싸는 게 마치 세컨드 유니폼이라도 걸친 것 같았다. 이름 모를 감각이 느린 속도로 차오른다. 가쿠란이 있었다면 수고를 들여 히나타의 담요를 가져갈 이유가 없었으며, 애초에 그다지 차갑지도 않은 온도에 요란스레 반응하지 않아도,

재차 의식적으로 생각을 자른다. 문장의 뒤를 잇지 않으려 책상 위에 엎드릴 때까지 핑계를 댄다. 추웠으니까. 차가운 게 싫었으니까. 담요가 포근하니까. 촉감이 마음에 드니까. 색이 유니폼을 닮았으니까. 그냥.

그냥…. 그러고 싶었으니까.

결국 눈을 감았다. 앞자리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쉽게 잘 수 없을 거란 예감이 든다.





**





겨울이 마지막 기승을 부리려는지, 졸업식 바로 전날도 제법 쌀쌀한 날씨를 유지했다. 역시 이런 날에는 봄을 꺼낼 수가 없었다. 더 정확히는, 이런 날씨에는 봄을 꺼내고 싶지가 않았다. 봄이라는 건 조금 더, 따뜻하고, 좀 더 부드러운 게 아니던가. 햇빛이 놓은 길을 따라 벚꽃이 살랑이는. 더는 네가 가진 천 쪼가리가 필요 없을.

가쿠란에 팔을 꿴 지 한참인 몸은 여전히 히나타의 것을 노렸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따로 담요를 들고 다니지 않았는데, 그가 호시탐탐 노릴 때마다 나츠가 골라준 거라며 응수하던 히나타도 의외로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히나타가 지적한 건 오히려 며칠간 묻어뒀던, 겨울의 일이었다. 졸업 직전에서야 그 일을 꺼냈다.



카게야마.

왜.



히나타 쇼요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이름을 불러서 카게야마는 직감할 수 있었다. 어떤 주제를 꺼낼지 알 수 있었다. 그날 들었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아직 기억한다. 히나타도 기억할 터였다.



“너는 왜 내 담요 가져갈 때마다 네 옷을 줘?”



완벽히 예상한 질문이다.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입안으로 말을 밀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하지만 말하지 못한다는 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은 아니다. 핑계로 댔던 여러 이유를 댈 수도 있고,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한 정제되지 않은 무언가를 횡설수설하며 뱉을 수도 있다. 어떤 단어라도 조합할 수 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그냥.”

“그래?”



히나타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카게야마가 어슴푸레하게 닿기 직전의 사유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마음으로 히나타에게 옷을 덮어줬는지, 어떤 마음으로 눈을 뜬 그에게 옷을 거둬갔으며 무슨 핑계를 대고 왜 이유를 대지 못하는지. 모르는 것을 묻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아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됐어.”



그런데도 그대로 넘어가려고 하는 게 거슬렸다. 왜? 알고 있으면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한테 따져야 하는 거 아니야? 뭘 알고 있길래 저런 반응이지? 왜 다 묻고 떠날 사람처럼.

주위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히나타 쇼요는 떠날 사람이 맞았다. 온 집중이 히나타를 향했다. 큰 교실에 둘만 남겨진 것 마냥. 외딴 계절에 똑 떨어져 외부와 차단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이런 찝찝함을 간직한 채라면 그 누구도 남겨진 겨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따가 배구나 하자.”



하지만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끌어올림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상황을 넘기기 위한 효율적인 진심이라도 그 말에는 자동으로 반응하게 된다. 어찌 됐건 본인도 아무 저항 없이 매몰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힘을 빼고 순순히 끌려 올라갔다. 근처에 앉은 급우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섞여 들렸다. 우습게도 그제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래.”



그리고 그게, 다음날 졸업식이 끝난 직후 카게야마가 체육관으로 발을 돌린 이유였다. 걸리적거리는 가쿠란도 가방도 졸업 증서도. 전부 한 구석에 내려놓고 공을 잡았다. 가족에게는 잠시 다녀온다고 말을 하고 왔으니 시간을 오래 잡아먹을 순 없었다. 기껏해야 공 몇 번 튀기고 나면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교복을 입을 이유나 이 학교로 돌아올 합리적인 명분이 사라지게 된다. 그 후에는, 그다음엔,

손안에서 익숙하게 공이 돌았다. 몇 번이고 했던 자세로, 몇 번이고 날렸던 공을 친다. 히나타가 곧 올 것이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의 서브가 맨바닥을 치지 않았을 때, 가장 완벽한 소리를 내며 가장 완만한 곡선으로 그의 공이 바닥을 쳤을 때. 카게야마는 어쩌면 환희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미약한 불안을 결국 기대로 승화시켜 히나타의 떠남을 받아들이게 됐다. 어떤 겨울은 남아있을 테지만 너를 붙잡지는 못할 테지. 히나타가 순환시킨 봄은 겨울로 돌아갔지만, 카게야마는 스스로 봄을 향해 다시 순환할 것이다. 히나타 쇼요가 시원하게 웃었다. 둘에게 영원히 박제될 순간이었다.



“또 보자! 카게야마.”



봄인가?



“그래.”



3월의 끝, 새로운 시작에 도달할 어느 날. 카게야마 토비오의 겨울은 다시 봄을 향하기 시작했다. 히나타 쇼요가 떠나더라도 그에게는 배구가 있으니, 틀림없이 봄에 다다를 것이다. 그러니 카게야마는 여름에 태어난 히나타가, 훗날 지나치게 그와 잘 어울리는 나라에서 돌아올 때, 봄으로 역행하기를 바랐다. 순리를 따라 겨울로 순환하는 게 아니라, 히나타를 위해, 카게야마를 위해, 힘들더라도 계절을 거슬러 봄으로 되돌아오기를 바랐다. 다시는 네 담요 같은 것에 집착하지 않고, 네게 내 옷을 덮어주기를 바라지도 않을 곳으로. 내가 너에게 무언가를 말할 수 있을 그곳으로.

그러므로, 다음에 만날 때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내 봄이 아니라,



네가 돌아올 네 인생의 봄에서.



“또 보자.”



서 있는 자리에서 벚꽃은 보이지 않았지만, 확신이 들었다. 계절의 이름을 묻는 작은 질문에 빠르게 긍정했다.



“너 빨리 머리나 잘라. 덥수룩해서는.”

“자르려고 했거든요!!!”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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